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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청소년보호의 정언명령
기사입력  2020/03/30 [10:54]   편집국

최근 텔레그램을 통한 아동․청소년과 성인의 성착취물 불법제작과 게시, 그리고 불법이용자로 인한 사회적 이슈가 엄청나다. 

 

오랫동안 이어왔던 코로나19나 4·15총선과 같은 이슈를 덮을 정도로 전대미문적인 파괴력을 보인 이번 ‘n번방’, ‘박사방 사건’에 대해 우리 사회의 진면목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이를 악용한 이용자의 치밀하고도 악마적 행태에 수많은 사람들이 치를 떠는 모습이다.

 

만약 피해자들이 여전히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더라면, 또 우리가 여전히 이들의 아픔을 깨닫지 못하였다면 더 이상 생각의 끈을 이어나가기조차 두렵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은 일부 반성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였는가에 대한 자괴감도 무겁게 내려와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그동안 우리 주변에는 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가진 경우를 너무도 많이 보아 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이중적 행동은 사회적 약자의 보호필요성을 역설할 때마다 오히려 청소년들의 역기능적 행동을 더 부각시켰고,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대한 필요성을 약화시키거나 무력화하려는 시도는 물론이고 무언의 동조를 한 경우도 배제할 수 없었다.

 

청소년보호의 필요성만큼 청소년들이 벌인 비이성적 행태를 먼저 떠올리며 보호의 필요성을 희석시키는 데 앞장서는 경우도 많았다. 

 

청소년이기에 벌인 반사회적 행태는 보호의 당위성을 상쇄시켰고 사회로부터 격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의 정당화를 이끌었으며 스스로 이에 합리적인 위안을 얻으려 했던 경우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청소년보호는 가언명령(假言命令)이 아닌 정언명령(定言命令)이어야 한다.

 

 그래서 칸트는 어떠한 상황, 환경, 행위의 형식이나 목적, 결과에 관계없이 지켜 주어야 하는 절대 선(善)의 행위로 규정되는 것을 정언명령이라고 하였으며, 이는 청소년보호에 반드시 적용되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즉, 만약 어떤 조건이 주어지면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가언명령이 아니라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정언명령을 가언명령으로 조건화하려는 시도를 하는 걸까? 정언명령은 지켜야 하는 도덕적 선이기에 반드시 지켜야 하지만 지켜지지 못하는 이유를 인간의 이성과 의지에서 찾았기 때문에 칸트는 분명 현실사회에서 적용의 어려움이 존재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끊임없이 정언명령을 통해 청소년들의 보호에 대한 필요성을 중시해야 하는 목소리를 던졌음에도 이는 소수의 작은 메아리가 되어 버렸고, 순간과 상황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다수는 애써 명령을 외면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청소년들이 사회적 공분의 대상이 되어서 문제를 일으킨 경우도 상당하다. 그렇기에 무조건적으로 모든 청소년들의 절대적 보호를 위한 장막(curtain)을 쳐야 함도 아니다. 

 

자신의 잘못과 죄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내림과 동시에 이들의 사회적 회복력(resilience)을 키우기 위한 부분에 관심을 기울이는 주문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간의 교묘한 줄다리기와 협상은 서로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작용하여 도덕성과 사회적 기준에서 정언명령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번 n번방, 박사방 사건을 통해서 우리네 자화상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너무도 악한 비이성적 행태가 지배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스스로 부정행위에 대한 심리적 불안도 다수의 참여행위로 희석되어지고, 불법적 행동 역시 자기합리화를 위한 조건으로 전환되면 이를 이성적 판단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청소년들의 행동과 상황, 성장과 발달, 그리고 어떠한 이후의 지원이 뒤따라야 하는지의 관심과 도움을 표명해 달라는 희망 섞인 주문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 약자를 돕는 판단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정당화하고자 매몰찬 독주를 합리적 의사결정이라고 믿게 되는 순간 불법적 행위를 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최면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청소년들의 삶을 위해하는 상황이나 조건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되 이들의 행태를 강력하게 규제하려는 법과 제도를 어느 정도는 갖추고는 있다. 

 

그러나 청소년보호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부재한 상태이자 극한적 목적에 매몰된 상태라면 이들의 보호에 어떠한 체계가 작동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청소년보호를 위한 관련법은 규제법과 지원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청소년의 복지와 활동을 지원하는 법이 있는가 하면 유해약물, 유해매체, 유해환경에서 보호받고 아동․청소년성의 매매나 불법적 행위로부터 보호를 하는 규제법이 존재한다.

 

규제법은 청소년들의 생활환경을 억압하고 이들의 삶을 해악으로 이끄는 상황을 강력하게 규제해서라도 지켜 주어야 하는 법으로 규제의 대상이 청소년이 아니다.

 

규제법은 행동을 제약하고 벌칙을 주려다 보니 선제적 대응을 하기 어렵다. 환경이 변화할 것을 미리 예측하여 규정을 만들 수 없다 보니 항상 사후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

 

이번 텔레그램 사건 역시 법망의 소홀함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보호에 대한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되며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가 지켜야 할 정언명령임을 항상 마음속으로 새기고 또 새겨야 한다.

 

/디컬쳐 칼럼니스트 권일남(명지대학교 사회과학대학장)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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