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칼럼]분출보다 더 세밀한 폭력해결책이 시급

칼럼니스트 권일남 | 입력 : 2021/03/01 [16:28]

▲ 사진=스포츠 폭력을 다룬 영화 <4등> 스틸컷  

 

학교폭력의 피해경험과 아픔이 단기적이지 않고 지속적이며 오래 영속된다는 것을 이번 일련의 각종 논란에서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스포츠분야를 매개로 촉발된 각종 폭력의 아픔을 보면 수년이 지난 오늘에도 사라지지 않고 저마다 가슴의 비수로 자리 잡고 있으며, 동시에 기회를 엿보며 표출형태도 매우 다양한 속성을 보였다.

 

또 오랜 시간이 흘러 자세히 알기 어렵지만 관계자가 말하는 내용에서도 폭력의 문제가 충분히 나타날 수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직접적인 폭력을 가한 적은 없지만 감독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시간대에 처해 있거나 유망한 선수중심으로 움직이는 속성상 암묵적 서열화의 위협은 항상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권한을 특정 대상에게 위임하게 되면 여러 문제가 양산될 가능성이 크기에 지도자의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 

 

유망한 선수가 성적을 내기 위해 노력하며 좋은 결과를 만들었을 때 이들이 갖게 되는 힘은 수많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권력의 원천이 되며 그 결과는 자연스럽게 상하관계로 이어질 여지가 크다. 

 

또 유망하나 자라는 과정에 있기에 다소 부족한 능력의 친구는 암묵적 힘을 발휘하는 이들로 인해 상급학교나 기관으로 가야 할 길에 더불어 놓여있어서 참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책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어느 학부모의 말이 더 신빙성 있게 들린다.

 

그래서 스포츠분야는 다른 어떠한 곳보다 더 세심하고 차별화된 전략과 대응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폭력이 교사나 어른들이 모르는 상태에서 은밀하게, 다수가 소수를 또는 사이버 상에서 따돌림이 이루어진다면 스포츠폭력은 감독이나 코치 등과 같은 어른들이 알면서 또는 묵인 하에 이루어질 수도 있기에 어른들의 인성에 바탕을 둔 지도력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제 특정 분야인 연예와 스포츠가 아닌 더 많은 분야로 폭로가 들불처럼 옮아갈 수 있다. 언제 어디서 이와 유사한 일이 발생하여 피해자와 가해자가 양산될지 아무도 모를 지경이다. 

 

그러나 그때 그 시절 누군가로부터 받은 피해를 안고 살아가는 소시민이지만 그 대상이 보이지 않기에 발산할 통로를 얻지 못한 채 작금의 상황을 보며 분노와 울분에 휩싸여 힘들어 하는 보이지 않는 이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과거 폭력행위에 대한 분출과 발산의 경로가 여론전 형태로 지속되는 순간 문제의 해결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대안 없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이라고 자기 속단에 의한 주장을 펴면서 언론에 기대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들 우려가 크다.

 

최근 일련의 사태 발생 이후 언론에서 가해대상자들이 어디에 숨어있는가? 왜 이들은 조용한가? 등의 말을 하면서 결자해지가 필요하다는 등의 말을 하는 이들은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여 분위기를 조성하고 대안을 인정하도록 하는 서로의 합리적 판단을 제기해 주는 여건을 만들고 있는지는 의문시 된다.

 

물론 어느 대상이 옳고 그름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을 위한 우리 모두의 성숙한 의식과 사고의 전환이 선결되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문제를 제기하고 또 혼자 대안을 제기하는 등의 형식은 올바른 대안을 마련해내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까지의 학교폭력에 대한 대책은 주로 대증적 요법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었다. 가해와 피해를 격리하고, 전학시키는 등 ‘보이지 않게’ 하면 없어진 것으로 믿었던 우리의 인식과 대처방법이 안일하였음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기에 지금의 학교폭력의 접근방식에 일대 혁신적 전환이 있어야 한다. 

 

학교폭력예방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각종 심의기구를 마련하여 가해와 피해를 구분하는 여러 제도적 노력을 핵심 대안인 것처럼 제시한 순간부터 대립적이고 양립적인 대결구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피해를 말하려는 자와 숨기려는 자간의 치열한 공방은 상호 공감과 배려의 마음이 없어지고 생존의 터전으로 변해버렸기에 학교는 마음으로 공감하며 작은 아픔이라도 공감해 주려는 기회를 상실해 버린다.

 

작금의 스포츠폭력을 대하는 여러 상황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이 앞서는 것은 왜일까? 마치 가해와 피해자의 상황을 조율하고 마음을 치유하려는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법에 잣대와 기준에 입각한 형식을 앞세워 극단을 치달리는 자신의 주된 역할만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종국에 원하려는 것인지 씁쓸하다. 

 

진정으로 사회에서 서로가 공통의 눈높이를 만들어 가려는 시도를 하려는 방향성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학교폭력은 어느 누구든, 어떤 상황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다. 장난이었다거나, 그 정도로 심각한 상태인지 몰랐다거나 하는 등의 말은 오히려 피해자의 마음에 더 큰 결계를 치게 만드는 행위이다. 

 

우리가 그동안 누누이 되 뇌였던 인성교육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구에 가까웠으며 실효적이지 못한 대책이었는지를 다시금 상기해 보고 학교가 어떻게 하면 학교폭력이라는 행위에서 자유롭고 동시에 이 모든 대상을 위한 마음의 안식을 이끌어 주는 방법을 찾는 것이 필요한지 더 많은 고민이 시급하게 필요한 때이다.

 

/디컬쳐 칼럼니스트 권일남(명지대학교 사회과학대학장/한국청소년활동학회장)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포토뉴스
이동
메인사진
(포토)꽃구경 나온 시민들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