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KS(경기고·서울대 출신)는 아니어도, 경기고를 나와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중 한 곳인 고려대를 나왔으니, ‘간판’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에서 본인의 의지만 있으면 꽤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위장취업’ 하던 시절, 그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 진짜로 노동자가 되고 싶어 용접공이 됐다.
그는 국회의원일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섰다. 단지 제스처만 그렇게 취한 게 아니라, 진짜 그들에게 공감하려 애썼다.
어떻게 하면 민중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고민해 그는 1992년 진보정당추진위원회를 결성했고, 백기완 선생을 대통령 선거에 ‘민중후보’로 내세웠다.
평소 노동운동가들에게 노동자와 함께 하기 위해서 노조에 들어가라고 강조하던 그는 당시 검찰총장인 김기춘(후에 박근혜 정부 대통령 비서실장)이 빼든 칼자루에 구속됐다.
그는 감옥 안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그가 신봉하던 사회주의의 몰락을 지켜봐야 했다. 그래서 그는 ‘합법 정당’을 만드는데 힘을 썼다.
그에게 창당은 목표가 아닌 수단이었을 뿐이지만, 무려 10년 동안 진전이 없자 아내가 이제 그만 하라고 말렸다.
그러나 노회찬은 아내에게 언젠가 진보정당은 필요한데, 지금 포기하면 나중엔 더 오래 걸린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 시절 그는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만나 함께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1년 군소 진보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을 관철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8번을 받은 그는 선거대책본부장 자격으로 TV 토론에 출연하면서 국민들의 공감을 이끌어내 결국 국회에 입성했다.
그렇게 대중 앞에서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집에선 대화가 적어 아내가 당신이 변하지 않으면 같이 못 산다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아내에게 진심을 담아 편지로 미안함을 전했다.
국회에 입성한 이듬해인 2005년 그는 이른바 ‘삼성 X파일’을 통해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검사 명단을 공개했다.
그는 국정감사 때 하나 터트리고 그 후엔 신경 쓰지 않는 다른 의원들과 달리 계속 이 사안을 끝까지 가져갔다.
그러나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2002년 대통령 선거 때보다 못한 성적표를 받아든 ‘원내정당’ 민주노동당은 당원들이 지도부에 실망해 대규모 탈당 러시를 맞았고, 이때 의원들도 탈당하는 분위기가 연출됐다.
당시 그는 진보정당 실험이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결국 진보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후 그는 진보신당 이름으로 서울 노원구에서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데 이어, 2010년 서울시장 후보로도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더욱이 같은 선거에 출마한 한명숙 후보에게, 한 후보가 사퇴해 주면 자신이 당선된다며 압박했던 것이 한명숙 후보의 패배 원인으로 지목돼 심적 고통은 더 컸다.
2011년 통합진보당에 합류한 그는 다음 해 19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다시 국회에 입성했다.
하지만 2013년, ‘삼성 X파일’ 공개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그는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리고 2016년 당의 권유로 창원에서 출마해 다시 국회에 입성했으나, 그 시기 건강이 악화됐다.
건강이 나빠지자 자연스레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은 오히려 늘어났다.
그런 그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2018년 ‘드루킹 사건’ 특검이 사건을 조사하던 중 ‘경제적 공진화 모임’이 노회찬 의원에게 2차례에 걸쳐 5천만 원을 건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미 해당 단체로부터 몇 차례 강의료를 받은 적이 있던 노 의원은, 당시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은 후원금”이라는 말에 강의도 하지 않은 채 2차례에 걸쳐 돈을 전달받았다. 그는 당시 나중에 정식으로 후원금 처리하면 되겠지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드루킹 특검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평소 자신이 ‘삼성 떡값 검사’ 등을 비난해 왔는데 본인의 언행이 일치되지 않았다는 점이 너무 수치스러워 결국 2018년 7월 23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노회찬 6411>은 새벽에 구로동에서 6411번 버스 첫 차로 강남에 출근하는 미화원들에게 ‘아주머니’가 아닌 본인의 이름을 되찾아 주고자 노력했던, 인간 노회찬의 모습을 담았다.
처음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노회찬재단에 도움을 요청하자, 노회찬재단 조돈문 이사장은 신파(新派)가 아닌 인간 노회찬의 유쾌한 모습도 담아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 속 노회찬은 상당히 유머러스한 모습을 보인다. TV 토론에 나가 툭툭 던지는 그의 ‘뼈있는 농담’ 한마디는 방청객이나 시청자는 물론 상대 진영의 토론자도 공감할 수밖에 없다.
수천억 원의 뇌물을 받고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과 아들이 수십억 원의 퇴직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현역 국회의원의 모습과 너무 대비되게 살았던 노회찬.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가 속했던 정당을 지지했던, 그렇지 않았던 그것을 떠나서 인간 노회찬이 그리워지는 건 비단 기자뿐일까?
다큐멘터리 영화 <노회찬 6411>은 다음 달 14일 개봉한다.
/디컬쳐 이경헌 기자 <저작권자 ⓒ 디컬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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